夜は短し歩けよ乙女

그렇다면 남아있는 답은 하나다. 나는 실제로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세상에는 대학생쯤 되면 애인이 있다는 나쁜 편견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거꾸로인 것이다. '대학생쯤 되면 애인이 있다'라는 편견에 등을 떠밀린 어리석은 학생들이 분주하게 자신을 겉치장한 결과 이놈이고 저놈이고 애인이 있다는 괴현상이 발생한다. 뿐만아니라 그 괴현상은 또 다시 편견을 조장한다.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바라보자. 나는 또 편견에 떠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고한 남자인체 하면서 실제로는 유행에 취해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한 것은 아닐까. 사랑에 빠진 아가씨는 귀엽기라도 하지 사랑에 취한 남자들의 꺼림칙함이란!

도대체 나는 그녀의 무엇을 알고있단 말이더냐. 뚫어질정도로 쳐다본 뒤통수 이외에 무엇 하나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주제에 어찌하여 반했다고 하는 것인가. 근거가 불명확하다. 그것은 곧 내 마음의 공허에 그녀가 우연히 들어맞은 것뿐이 아닌가.

그녀의 존재를 이용해서 내 마음의 공허를 메우려고 했다. 애초부터 그 연약한 영혼이 문제였다. 수치를 알아야 한다. 그녀에게 엎드려 사과해야만 한다. 안이한 해결을 생각하기 전에 내 꼴을 두 눈 크게 뜨고 보아라. 그리고 벽을 마주하고 달마 오뚝이처럼 얼굴을 붉히고 조용히 부풀어 있어야 한다. 그런 역경을 딛고 올라선 다음에야 '인간적 완성'이 가능하리라.

 

「夜は短し歩けよ乙女」264~265p

 

입학 이후 조금도 올라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올라갈 예정도 없는 학업성적.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하는 도피처를 앞세워 쳐다보기만 했던 취업활동. 기지도 없다. 재능도 없다. 저금도 없다. 완력도 없다. 끈기도 없다. 카리스마도 없다. 사랑스러워서 뺨을 비비고 싶어지는 아기 돼지같은 귀염성있는 남자도 아니다. 이만큼의 '없다 없다의 남발'로는 도저히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나는 초조해진 나머지 만년 이부자리에서 기어나와 잠시동안 넉장반의 바닥을 탁탁 두드리면서 기어다니며 어딘가 귀중한 재능이 굴러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찾았다. 그 때 문득 1학년 때 '능력있는 매는 발톱을 숨긴다'는 말을 믿고 '재능의 저금통'을 서랍에 숨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게 있었지 않은가! 그래, 그거다!'라고 나는 기뻐졌다.

서랍을 열자 그곳은 길게 자란 버섯투성이었다. '어느새 이런 꼴이'라고 꺼림칙해 하면서도 나는 미끈거리는 버섯을 헤쳤다. 안쪽에서 꺼낸 '재능의 저금통'은 마치 나의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저금통을 거꾸로 들고 미친 사람처럼 털어보았지만 안에서 나온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그것에는 '할 수 있는 일부터 부지런히'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만년 이부자리에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夜は短し歩けよ乙女」274~275p

by 엘로이터 | 2011/05/23 04:01 | whole media | 트랙백

고백

  어제 퇴근길에 고백을 보고 왔다. 금요일 저녁이라서 그런지 일본영화임에도 상영 1시간 전에8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적당히 자리를 고르고 입장. 상영 개시 시간은 8시 10분이건만그 시간을 훌쩍 넘겨서도 광고가 끝나질 않더라.이런 씨발... 그럼 확실히 시작하는 시간을 적어놓던지, 어디다 항의하고 싶은데. 이거 항의 안되나? 공정거래 위원회라던가... 주말이라 오래 잤더니 두서도 없고 이야기도 새려고 하는데 어쨌든...

  나는 원작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티저로 본 내용이 전부였는데 티저를 보고 내가 상상한 이야기보다 영화는 더 멀리까지 나갔다. 근데 뭐랄까, 좀 핀트가 어긋났다고 할까. 과연 이 영화로 청소년 보호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두 살인자, 슈야아 나오키의 경우 슈야는 너무나도 특이한 케이스다.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틀린 환경과 그로 인해 비틀린 인성. 이걸 일반적인 청소년 범죄와 결부지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일까? 애초에 그 둘은 범인으로 지목되었지만 약한 처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가 사고사로 처리되어버린 것이다. 관객은 청소년 범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은 조금 다른 이야기이다. 청소년 범죄를 이야기 한다면, 아직 보지는 않아 정확히는 말할 수 없지만 히가시노 케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이 어울릴 것 같은데...
  아무튼 청소년 범죄 이야기라고 하기엔 핀트가 어긋나있다. 이건 영화탓이 아니라 홍보나 뭐... 그쪽을 탓해야겠지. 영화의 초점은 딸을 잃은 유코가 딸을 죽인 범인, 슈야와 나오키를 부숴가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슈야의 경우 시간적으로나 이야기의 비중으로나 유코와 비슷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고, 나오키의 이야기도 적지 않다. 청소년 범죄 이야기라는 것만 훼이크인게 아니라 주연이 마츠 타카코인 것도 훼이크였다... 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슈야는 너무나도 특이한 케이스다. 강박에 빠진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하다 끝내 버려지는, 그리고 어머니의 강박을 그대로 물려받아 자신을 몰아세우는 인물. 캐릭터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이래서는 캐릭터 하나 때문에 이야기 전체가 현실감을 잃어버린다. 리얼리티를 잃은 이야기는 작위적이게 된다. 나오키도 처음엔 평범한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인큐베이터같은 엄마 밑에서 자랐다, 라는 건데 그래도 뭐 슈야보단 낫긴하지만... 이라는 느낌. 오히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다른 부분이었는데, 유코가 복수의 도구로 이지메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자가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나는 교실을 보면서 폐쇄감같은걸 느꼈는데 바로 그런 느낌말이다.
  연출은 그냥 일본영화라는 느낌이었는데... 솔직히 그냥 그랬다;;; 전체적인 감상은 문제작이기는 하지만 충격의 문제작은 아니라는 생각. 요즘엔 리얼이 훨씬 더 충격적이다.(...) 오히려 연출로 그런 충격을 일부러 주려고 하는게 보여서 좀 반감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좀 오버하는 것 같아서 난 별로다.;;
  영화를 보기전에 트위터에서 산왕님이 기대 안하고 보면 괜찮다고 하셨는데 나는 기대를 하고 봐서 이런가 싶기도 하다-_-;

  이건 또 다른 얘긴데 요즘 사형수나 범죄자를 다룬 소설을 우연히 몇 권 연속으로 봤다. 이걸 통계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그 몇권들이 전부 대개 불우한 성장환경을 깔고 들어갔다. 고백의 슈야처럼 말이다. 물론 캐릭터를 작성하는데 성장환경이 비어있을 수 없고 그쪽이 훨씬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본성은 어디에 있는걸까. 같은 환경이라도 다른 반응을 할 수 있을텐데. 까놓고 말해 원래부터 또라이인 새끼도 있을텐데. 원래부터 또라이인 캐릭터는 소설보다는 게임이나 만화에서 더 잘 보이는데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신 캐릭터성이 강하기 떄문일...까?
  자다 일어난 멍한 머리로 꾸역꾸역 쓰긴 했는데 나조차도 뭔소린지 모르겠다. 에라이.

by 엘로이터 | 2011/04/09 21:57 | whole media | 트랙백

긴 꿈이었다.

  요 며칠 게임에 빠져있었다. 파이널 판타지 택틱스와 세계수의 미궁. 뭐라도 몰입하지 않으면 짜증이 났고, 그 짜증은 또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아르바이트 구인 사이트를 보다 짜증을 냈다. 읽혀지지 않는 사회과학서를 보며 짜증을 냈다. 벌써 두달이 넘게 멈춰서있는 문서파일의 커서를 보며 짜증을 냈다. 하지만 어찌 할 수도 없었다. 내 스펙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내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내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가지기 시작한 것은 10년도 더 전이었다. 내 고등학교 시절의 일기장은 정신병자가 쓴 것처럼 같은 문구로 도배되어있다. 2학년을 다니고 휴학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2008년 2월도 그랬다. 그리고 바로 얼마전, 6개월 전도 그랬다.
  하지만 어째서 나의 커서는 두달도 넘게 멈추어있을까. 내가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킬 정도로 뜨거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온도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뜨겁지 않아도 물은 기화한다. 기화한 물은 언젠가 다시 응결되어 물이 되고 또 기화할 것이다. 운명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있다면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였을 것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요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게 되어있지 않은 인간이라는.
  격렬한 심경의 변화나 어떤 경계선을 거친 것도 아닌데, 나는 마음속에서 그것을 놓기로 했다. 아니, 이미 놓았다. 다시는 무언가를 써서 이야기를 만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되어있지 않은 인간이 억지로 그런 환상을 쫓아봤자 허망할 뿐이다. 줄곧 꾸었던 언젠가는 내 세계를 구축한다는 꿈. 긴 꿈이었다.

by 엘로이터 | 2011/03/04 21:29 | my around(private) | 트랙백

그러니까, 이렇게 쓰고 싶었던거다.

http://blog.daum.net/kundera/12610129

근데 능력이 안되니까 그렇게 밖에 못쓴거지... 에라이...
특히 김영하가 문학의 언어로 퇴각했다는 얘기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예술적 낭만주의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는 얘기도.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글이 많이 독해지면서 비약이 나타나는 것 같다. 역시 글은 독하게 쓰면 안되나.

by 엘로이터 | 2011/02/16 16:50 | Dog'matic segment | 트랙백

김영하 작가에게 실망했다.

http://sooosleepy.wordpress.com/2011/02/13/%EB%AC%B4%EC%97%87%EC%9D%84-%ED%95%A0-%EA%B2%83%EC%9D%B8%EA%B0%80/
김사과 작가의 글

http://kimyoungha.com/tc/153
김영하 작가가 김사과 작가의 글에 보내는 댓글

  얼마전 김영하 작가가 '작가는 언제 작가가 되는가'라는 주제로 신춘문예를 통해서만이 작가가 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논지의 글을 올렸다. 그 글에서 김영하 작가는 '작가는 자기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작가이다'라고 하였다. 그것에 대해 조영일 비평가(필명 소조)가 반박하는 글을 올렸고 두 사람 사이에서 반박글이 오가며 논쟁을 이어졌다. 나는 우연히 그 논쟁을 접하고 주의깊게 주시하고 있었고 생각보다 그런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이 뉴스가 되어 이 논쟁은 더욱 알려졌다. 위 두 글은 그런 맥락에서 쓰여진 글이고 이미 널리 알려졌기에 찾아 읽기에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김영하 작가에 대해 잘 몰랐다. 한국 문학 자체를 잘 읽지 않았고 어쩌다 읽은 것도 장르 문학이었다. 나의 관심도 주로 장르 문학이나 만화와 같은 서브컬쳐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내가 장르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소위 '예술'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가진 반감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고상한척하고 우아한척 하며 대중의 구미를 맞춘다는 이유로 장르를 폄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구체화하면서 그들에 대해 알지 않을 수 없었고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반감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내가 보기에 김영하 작가의 글은 그런 예술적 낭만주의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조영일 비평가의 글은 과격하지만 솔직하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기점으로 논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했다. 나는 김영하 작가의 글에 한순간 호도되었다. 제자를 잃은 스승이라는 뻔한 서사에 휘둘리고 말았다. 머리가 식고나니 김영하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김사과 작가의 글은 솔직하다. 이 사회가 가진 구조적 한계를 알고, 그것을 넘어 그 한계 안에서 한정지어진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조영일 비평가를 비난한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조영일 비평가의 트윗은 그의 마초적 생각이 아니다. 아직도 가부장제를 벗어나지 못한 이 사회의 현실이자 우리가 처한 오늘이다. 그래서, 예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엊그제 무릎팍 도사에 나온 공지영 작가가 이렇게 말했다. '가난은 예술의 동력'이라고. 그 발언에 대해 나는 너무 불편했다. 가난한가 그렇지 않은가로 예술가인가 아닌가가 결정지어지는 것일까. 왜 동력이어야 할 가난이 최고은 작가를 죽였나. 가난이 먼저인가 예술이 먼저인가. 어느 시대에서든 예술가는 가난했고 배고팠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소득 2만불을 외치고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고자하는 서울시에서 32살의 젊은이가 아사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나.
  사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은 예술가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부모의 경제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어느 젊은이건간에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젊은이가 아사하는 사건은 많지 않다.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그녀가 예술가였기 때문에. 두번째 이유는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가 예술가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처럼 들린다. 실은 동어반복이 맞다. 아사를 하는 사망자가 1년에 몇 명씩 뉴스를 탄다. 대부분 독거노인이나 방치 유아이다. 젊은이는 거의 없다. 왜일까. 젊은이는 생존을 위협받는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굶어 죽지 않는다. 생존이라는 본능적 가치가 걸린 이상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노력한다. 훔치거나 뺐거나 사기를 쳐서라도. 그게 아니라면 자살을 한다. 마음이 꺾이고 희망을 잃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지언정 가만히 앉아서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고은 작가는 작가였다. 무직자가 아니었다. 최고은 작가가 남긴 마지막 메모에서도 그런 글귀가 있다. 2월중에 못 받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최고은 작가는 예술가라서 굶어 죽었다.
  그런데 왜 최고은 작가의 죽음이 예술가만의 일이 아닌가. 모든 젊은이의 일이라면 왜 예술가가 아닌 아사자가 나오지 않는가. 그것이 두번째 이유이다. 대한민국에서 20대에 경제적 자립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서는 단 6개월을 살아가는 것도 쉽지가 않다. 최저 임금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월세 보증금 기백만원에 벌벌 떨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살아남는 것을 위해서 전력투구를 한다. 전력투구를 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는 그럴 수 없다. 금전적 생존의 측면에서 보자면 예술은 한 없이 비효율적이다. 그들은 생존에 전력투구를 할 수 없다. 대한민국 서울이 아마존 정글인가? 생존에 전력투구를 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니.
  나는 김사과 작가의 글에서 그런점을 느꼈다. 예술가이든 예술가가 아니든. 그런 것을 떠나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가지는 교점. 그리고 김영하 작가의 댓글을 읽었다. 나는 한층 더 분노했다. 이런 사람이, 작가라니.

  김영하 작가의 댓글을 보자. 첫번째 문단에서 그는 스크린 쿼터 존속을 위한 영화인의 투쟁이 대중에게 어떤 반응을 얻었나 하는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두번째 문단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문 인용하겠다.

대중은 예술가가 신화적 존재로 자신을 희생할 때 비로소 받아들인다. 아니면 광대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예술가가 가진 이런 복잡한 제의적 성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은 예술가를 선망하면서 동시에 멸시한다. 예술가들이 자신을 대중과 '동등하면서 다른' 존재라고 선언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대중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예술가는 대중이 차마 행하지 못하는 욕망의 대리자다. 그래서 복잡하다. 다시 말해, '예술가 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예술가가 직면한 냉엄한 현실이기도 하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예술가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순간 대중은 예술가를 외면한다. 예술가는 신화적 존재로 자신을 포장했을 때만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술가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주창하는 것은 예술가가 가져야할 신화적 존재로서의 포장을 벗겨버리는 일이다. 그것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예술가 자신의 발밑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진정한 예술인가? 그것이야말로 광대가 아닌가. 신화적 존재로 자신을 포장해야만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니, 바로 얼마전까지만해도 '작가는 자기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작가다'라고 말하던 당신이 맞는가?
  그리고 다음 문단에서 김영하 작가는 예술가들이 연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들의 신뢰와 연대.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결과물을 이미 갖고 있다. 문인협회나 작가회의를 비롯한 단체들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의 문화예술위원회도 이런 연대와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있는데도 왜 궁핍한 예술가들이 줄어들지 않는지를 실사구시의 눈으로 살펴야한다. 단체를 하나 더 만들거나 지원금을 더 받아낸다고 해결될 문제일까? 계속 생겨나는 영화학과, 이런저런 컨텐츠 학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늘어나는 공급은? 그리고 예술가 단체 내부의 정치는? 기금의 누수와 낭비, 나눠먹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현실적 문제들을 고민하지 않는 한, 선언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예술가들의 연대라고 예로 든 것들이 '문인 협회'나 '작가 회의'란다. 나는 문단 내부의 일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박민규 작가를 비롯해 조영일 비평가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문단'은 폐쇄적이고 건강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다. 김영하 작가는 현실을 들며 이런 연대와 투쟁들이 공허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저런 단체들이 건강하지 못하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 가장 쉽고 매력적인 말은 "예술가들을 당장 구원하라!", "정부는 각성하라.", "예술가들을 위한 세금/기금을 거둬라.", "예술가들이 뭉쳐 싸워야한다"는 식의 말이다.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왜 그러겠는가. 나도 혜택을 볼 것인데.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예술의 역사와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 어떻게 궁핍한 예술가들의 문제를 해결할지를 고민하지 않는 한, 언제 그랬냐는 듯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민이 부족함을 들며 저러한 외침이 실질적으로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을을 말한다. 어느정도는 동의 한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나는 동네 아는 형에게 이런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 중 한명인 '작가 김영하'에게 그런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다. 위치적으로 김영하 작가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문제가 생겼을 때 최첨단에 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김영하 작가는 작가이기 이전에 김영하 개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분노하는 것은 김영하 작가가 작가가 처한 현실과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영하 작가 자신이 말한대로 그는 '신화적 존재'가 되어 대중의 동경을 받으려는 것이다. 현실적 문제에 연관되는 순간 작가의 신화성은 사라진다. 그래서 김영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이 부족하다는 말을 되풀이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조영일 비평가는 오해와 비난을 받으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대안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제시해야만이 그것이 옳거나 그름을 따질 수 있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영하 작가는 그저 총대를 메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너무 화가난 상태에서 쓴 글이기에 맥락이 어긋나거나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알아서 읽어주시기 바란다.




ps.최고은씨의 사인이 아사가 아니라 병으로 인한 발작이라고 한다. 정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주장을 바꿀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다.

by 엘로이터 | 2011/02/14 01:36 | Dog'matic segment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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