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ooosleepy.wordpress.com/2011/02/13/%EB%AC%B4%EC%97%87%EC%9D%84-%ED%95%A0-%EA%B2%83%EC%9D%B8%EA%B0%80/
김사과 작가의 글
http://kimyoungha.com/tc/153
김영하 작가가 김사과 작가의 글에 보내는 댓글
얼마전 김영하 작가가 '작가는 언제 작가가 되는가'라는 주제로 신춘문예를 통해서만이 작가가 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논지의 글을 올렸다. 그 글에서 김영하 작가는 '작가는 자기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작가이다'라고 하였다. 그것에 대해 조영일 비평가(필명 소조)가 반박하는 글을 올렸고 두 사람 사이에서 반박글이 오가며 논쟁을 이어졌다. 나는 우연히 그 논쟁을 접하고 주의깊게 주시하고 있었고 생각보다 그런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이 뉴스가 되어 이 논쟁은 더욱 알려졌다. 위 두 글은 그런 맥락에서 쓰여진 글이고 이미 널리 알려졌기에 찾아 읽기에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김영하 작가에 대해 잘 몰랐다. 한국 문학 자체를 잘 읽지 않았고 어쩌다 읽은 것도 장르 문학이었다. 나의 관심도 주로 장르 문학이나 만화와 같은 서브컬쳐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내가 장르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소위 '예술'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가진 반감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고상한척하고 우아한척 하며 대중의 구미를 맞춘다는 이유로 장르를 폄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구체화하면서 그들에 대해 알지 않을 수 없었고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반감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내가 보기에 김영하 작가의 글은 그런 예술적 낭만주의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조영일 비평가의 글은 과격하지만 솔직하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기점으로 논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했다. 나는 김영하 작가의 글에 한순간 호도되었다. 제자를 잃은 스승이라는 뻔한 서사에 휘둘리고 말았다. 머리가 식고나니 김영하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김사과 작가의 글은 솔직하다. 이 사회가 가진 구조적 한계를 알고, 그것을 넘어 그 한계 안에서 한정지어진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조영일 비평가를 비난한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조영일 비평가의 트윗은 그의 마초적 생각이 아니다. 아직도 가부장제를 벗어나지 못한 이 사회의 현실이자 우리가 처한 오늘이다. 그래서, 예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엊그제 무릎팍 도사에 나온 공지영 작가가 이렇게 말했다. '가난은 예술의 동력'이라고. 그 발언에 대해 나는 너무 불편했다. 가난한가 그렇지 않은가로 예술가인가 아닌가가 결정지어지는 것일까. 왜 동력이어야 할 가난이 최고은 작가를 죽였나. 가난이 먼저인가 예술이 먼저인가. 어느 시대에서든 예술가는 가난했고 배고팠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소득 2만불을 외치고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고자하는 서울시에서 32살의 젊은이가 아사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나.
사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은 예술가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부모의 경제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어느 젊은이건간에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젊은이가 아사하는 사건은 많지 않다.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그녀가 예술가였기 때문에. 두번째 이유는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가 예술가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처럼 들린다. 실은 동어반복이 맞다. 아사를 하는 사망자가 1년에 몇 명씩 뉴스를 탄다. 대부분 독거노인이나 방치 유아이다. 젊은이는 거의 없다. 왜일까. 젊은이는 생존을 위협받는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굶어 죽지 않는다. 생존이라는 본능적 가치가 걸린 이상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노력한다. 훔치거나 뺐거나 사기를 쳐서라도. 그게 아니라면 자살을 한다. 마음이 꺾이고 희망을 잃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지언정 가만히 앉아서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고은 작가는 작가였다. 무직자가 아니었다. 최고은 작가가 남긴 마지막 메모에서도 그런 글귀가 있다. 2월중에 못 받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최고은 작가는 예술가라서 굶어 죽었다.
그런데 왜 최고은 작가의 죽음이 예술가만의 일이 아닌가. 모든 젊은이의 일이라면 왜 예술가가 아닌 아사자가 나오지 않는가. 그것이 두번째 이유이다. 대한민국에서 20대에 경제적 자립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서는 단 6개월을 살아가는 것도 쉽지가 않다. 최저 임금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월세 보증금 기백만원에 벌벌 떨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살아남는 것을 위해서 전력투구를 한다. 전력투구를 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는 그럴 수 없다. 금전적 생존의 측면에서 보자면 예술은 한 없이 비효율적이다. 그들은 생존에 전력투구를 할 수 없다. 대한민국 서울이 아마존 정글인가? 생존에 전력투구를 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니.
나는 김사과 작가의 글에서 그런점을 느꼈다. 예술가이든 예술가가 아니든. 그런 것을 떠나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가지는 교점. 그리고 김영하 작가의 댓글을 읽었다. 나는 한층 더 분노했다. 이런 사람이, 작가라니.
김영하 작가의 댓글을 보자. 첫번째 문단에서 그는 스크린 쿼터 존속을 위한 영화인의 투쟁이 대중에게 어떤 반응을 얻었나 하는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두번째 문단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문 인용하겠다.
대중은 예술가가 신화적 존재로 자신을 희생할 때 비로소 받아들인다. 아니면 광대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예술가가 가진 이런 복잡한 제의적 성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은 예술가를 선망하면서 동시에 멸시한다. 예술가들이 자신을 대중과 '동등하면서 다른' 존재라고 선언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대중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예술가는 대중이 차마 행하지 못하는 욕망의 대리자다. 그래서 복잡하다. 다시 말해, '예술가 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예술가가 직면한 냉엄한 현실이기도 하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예술가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순간 대중은 예술가를 외면한다. 예술가는 신화적 존재로 자신을 포장했을 때만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술가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주창하는 것은 예술가가 가져야할 신화적 존재로서의 포장을 벗겨버리는 일이다. 그것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예술가 자신의 발밑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진정한 예술인가? 그것이야말로 광대가 아닌가. 신화적 존재로 자신을 포장해야만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니, 바로 얼마전까지만해도 '작가는 자기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작가다'라고 말하던 당신이 맞는가?
그리고 다음 문단에서 김영하 작가는 예술가들이 연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들의 신뢰와 연대.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결과물을 이미 갖고 있다. 문인협회나 작가회의를 비롯한 단체들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의 문화예술위원회도 이런 연대와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있는데도 왜 궁핍한 예술가들이 줄어들지 않는지를 실사구시의 눈으로 살펴야한다. 단체를 하나 더 만들거나 지원금을 더 받아낸다고 해결될 문제일까? 계속 생겨나는 영화학과, 이런저런 컨텐츠 학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늘어나는 공급은? 그리고 예술가 단체 내부의 정치는? 기금의 누수와 낭비, 나눠먹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현실적 문제들을 고민하지 않는 한, 선언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예술가들의 연대라고 예로 든 것들이 '문인 협회'나 '작가 회의'란다. 나는 문단 내부의 일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박민규 작가를 비롯해 조영일 비평가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문단'은 폐쇄적이고 건강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다. 김영하 작가는 현실을 들며 이런 연대와 투쟁들이 공허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저런 단체들이 건강하지 못하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 가장 쉽고 매력적인 말은 "예술가들을 당장 구원하라!", "정부는 각성하라.", "예술가들을 위한 세금/기금을 거둬라.", "예술가들이 뭉쳐 싸워야한다"는 식의 말이다.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왜 그러겠는가. 나도 혜택을 볼 것인데.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예술의 역사와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 어떻게 궁핍한 예술가들의 문제를 해결할지를 고민하지 않는 한, 언제 그랬냐는 듯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민이 부족함을 들며 저러한 외침이 실질적으로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을을 말한다. 어느정도는 동의 한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나는 동네 아는 형에게 이런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 중 한명인 '작가 김영하'에게 그런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다. 위치적으로 김영하 작가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문제가 생겼을 때 최첨단에 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김영하 작가는 작가이기 이전에 김영하 개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분노하는 것은 김영하 작가가 작가가 처한 현실과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영하 작가 자신이 말한대로 그는 '신화적 존재'가 되어 대중의 동경을 받으려는 것이다. 현실적 문제에 연관되는 순간 작가의 신화성은 사라진다. 그래서 김영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이 부족하다는 말을 되풀이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조영일 비평가는 오해와 비난을 받으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대안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제시해야만이 그것이 옳거나 그름을 따질 수 있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영하 작가는 그저 총대를 메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너무 화가난 상태에서 쓴 글이기에 맥락이 어긋나거나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알아서 읽어주시기 바란다.
ps.최고은씨의 사인이 아사가 아니라 병으로 인한 발작이라고 한다. 정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주장을 바꿀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다.